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미드 턴은 시즌 2가 진행 중인 것 같은데 시즌 1의 에피소드 2까지만 보고 말았습니다. 제가 그랬다는 것뿐이니까 여러분은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미국독립역사에서 새로운 부분을 아시게 될 겁니다."
4월 10일, 우드헐은 투명잉크로 톨맷지에게 급한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쓰고 있었다. 톨맷지가 어떤 경우에도 영국군에게 넘겨주지 말라던 암호잉크였다.
마지막 서명을 끝내고 방을 나서려던 순간에 영국군이 들이닥쳤다. 우드헐은 일부러 책상에 쓰러지며 투명잉크를 바닥에 쏟았고 잉크는 마루바닥 아래로 스며들며 사라졌다.
우드헐은 이제 모든 것이 끝이라는 것을 알았다.
1779년 봄, 뉴욕 시내에는 많은 첩보원이 있었고 도시의 모든 곳에서 정보를 모았다. 그렇지만 대단한 성과는 없었다. 훈련되지 않은 첩보원이 단독으로 활동하면서 마치 동네아이를 놀이터에 모아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첩보수준은 소문이나 가십거리에 불과했고 어쩌다가 구체적인 정보가 나오면 워싱턴은 영국군이 일부러 퍼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져야 했다.
워싱턴은 첩보체계와 효율성을 계속 요구했다. 마구잡이 첩보원은 성과에 비해 지불해야 할 대가(목숨)가 너무 컸다.
그렇지만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장군과 정치인은 개인첩보원을 고용했고 헝겊인형처럼 사방에 마구 내보내다가 불속에 던지는 일이 자주 일어났고 워싱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워싱턴은 명령과 실행체계가 중앙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톨맷지가 1778년 8월에 처음으로 뉴욕에 첩보조직을 만들었지만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예일대를 졸업한 24살의 젊은이 톨맷지는 워싱턴의 명령에만 움직이는 첩보조직을 약속했다.
그는 우드헐을 고용해서 첩보체계에 대해 훈련시키고 맨하탄에 가게를 열게 한 후에 정보원과 연락원을 연결시켰다. 정보수집에는 위험이 따랐다. 사소한 말실수, 과도한 질문이나 어설픈 행동은 치명상을 불렀다.
워싱턴의 가장 큰 고민은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 밖으로 빼내오는 것이었다. 영국군의 구체적인 움직임은 문서로만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데, 뉴욕 하숙집에서 자신의 기동사령부까지 올 연락원을 구해야 했다.
대륙군은 뉴욕을 완전히 봉쇄하지 못했고 하루에도 수 백 명의 시민이 영국군 점령지와 대륙군 점령지를 오갔다. 당연히 그 중에는 첩보원이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과 대륙군 모두 경비병과 초소를 세우고 의심가는 사람은 모두 체포했다. 그리고 초소를 지나는 시민은 모두 수색당했다.
전쟁초기에 뉴욕에 있던 정보원이 원시적인 암호와 투명잉크로 비밀편지를 쓰는 몇 가지 방법을 실험한 적이 있었다. 내륙에 사는 가상의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우유나 라임주스로 비밀메시지를 써넣고 영국군 초소를 지나 대륙군에게 전달했다.
대륙군은 편지를 불위에 그을려서 비밀메시지를 찾아냈다.
영국군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많은 첩보원이 붙잡혔다. 1778년 11월, 제임스 제이James Jay경이 비밀잉크 제조법을 들고 워싱턴 사령부를 방문하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제이는 조지 3세에게서 작위를 받은 물리학자이자 아마추어 화학자였는데 영국 액센트와 과도한 허세가 특징인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가족이 대륙의회를 이끌었을 정도로 독립군에게 충실한 집안이었다. 워싱턴은 그를 의심하지 않고 설명에 집중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첩보원은 예전처럼 가상의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 비밀메시지를 쓰고 봉투에 넣어 반출시키면 그만이었다. 제이의 비밀잉크를 사용하면 영국군이 불에 그을려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비밀메시지를 보려면 제이의 특수반응물질을 사용해야 했는데 제이는 절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제이는 최고수준의 첩보에만 사용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적의 손에 들어가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워싱턴은 비밀잉크를 ‘약’으로 불러서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게 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우드헐은 맨하탄 하숙집에서 체포되는 순간에 비밀잉크를 없앴다. 그런데 들이닥친 무리는 영국군이 아니라 하숙집에 머무는 사람들을 놀리는 젊은 아가씨들이었다.
영국군이 아닌 것을 알고 안심한 우드헐은 불청객을 내쫓았고 아가씨들은 입을 삐쭉이며 방밖으로 나갔다. 며칠 후, 우드헐은 강도를 만나 지갑을 빼앗겼고 이제는 더 이상 첩보원 노릇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톨맷지도 잠시 동안은 그가 일반시민으로 살아가게 내버려두었다.
7월 2일, 버나스터 탈렌톤Banastre Tarleton중령(나중에 도살자라는 별명이 붙은)의 기병대가 코넷티컷에 있는 톨맷지의 사령부를 습격했다. 톨맷지는 민병대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대부분의 짐을 두고 떠나야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워싱턴이 ‘C r’이라고 표현한 편지가 있었다. 그리고 편지에는 우드헐의 편지를 전달해주던 연락원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워싱턴은 연락원을 보호하라고 톨맷지에게 명령했지만 이미 영국군에게 체포된 후였다.
우드헐도 너무 불안한 상태여서 더 이상 첩보원 활동을 할 수 없었다. 톨맷지는 그를 롱아일랜드의 안전지대로 옮기고 새 첩보원인 로버트 타운젠드Robert Townsend(가명 사무엘 컬퍼Samuel Culper JR)의 연락원으로 활용했다.
우울해보이는 타운젠드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첩보원활동으로 우울증을 해소하려고 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는 훌륭한 첩보원이었고 효율적이면서도 과감한 활동으로 뉴욕의 첩보망은 아무런 문제없이 재개되었다.
이 글은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장면' (http://blog.daum.net/uesgi2003) 의 글을 일부 편집하였습니다. [Ues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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